「자연미술」의 확산과 순환을 위하여
전원길 (작가, 대안미술공간소나무 전시감독)
1980년대 초반 한국 야투그룹의 젊은 작가들은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유형의 미술을 시작했다. 나는 이들과 함께 작업하며 자연과 미술이 함께 존재하면서 서로 그 경계를 만들지 않는 예술을 실험했다.
자연미술이 발생하게 배경에는 1960-70년대 서구로부터 한국에 유입된 개념미술이나 대지미술 등의 영향이 있었다. 하지만 야투는 단지 서구 현대미술의 이론을 따르지 않고 자연과의 단도직입적인 만남을 시도함으로서 야투만의 독특한 방법론을 발전시켰다. 당시 야투작가들은 자연 속에 자신의 생각을 밀어 넣기 보다는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풀을 뽑아 나무에 올려놓고, 마른나무가지에 손가락을 대어보기도 학고, 때로는 잔잔한 물에 돌을 던져 파문 속에 흩어지는 자신의 형상을 바라보면서 자연과 교감하였다. 야투현장에서 작가들은 최소한의 행위로 자연과 만났으며 나의 표현의지가 자연과 균형을 이루는 상태를 보고자 하였다.
전원길 Jeon Wongil, Untitled 강희준 Kang Heejoon, 풀 Grass, 1985 1986 신남철 Shin Namchul, 1982
이 글을 통해 나는 자연미술운동이 40여년을 지속해 오면서 드러내고 있는 미학적 상황 즉 유형화, 탈개성화, 퇴행적 조짐을 극복하고 야투의 정신을 되살려 확산시키기 위한 방안을 생각해 볼 것이다.
II 자연미술의 위치
1980년대 초반 야투는 자연과 직접 교감하면서 작업하였다. 이는 미리 준비한 아이디어나 재료들이 현장 상황에 맞지 않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개인의 예술적 경험이나 미적 신념에 의존하지 않고 자연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면서 자연의 생명력을 자신의 작업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다. 이로서 야투는 '인간의 미술'에서 '자연의 미술'로 그 중심을 이동시켰다. 이는 자연과의 소통 지점을 찾으려는 인간의 본성적 의지의 결과이며 인간과 자연 관계 방식을 새롭게 하는 것이었다.
1. 유형화
야투가 40여 년간 활동을 이어 올 수 있었던 것은 자연과 미술이 일체화된 무한생성공간에서 작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존의 미술이 방법론적 변화를 추구함으로서 그 생명력을 유지한다면 자연미술은 자연이라는 생명의 원천을 작업에 담아냄으로서 형식의 변화를 통해서 얻어지는 추진력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야투의 개별 작업 모두가 자연과의 생생한 만남을 통해 그 생명력을 드러낸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야투의 방법론이 정착된 1980년대 이후 기존 야투 작업을 훌쩍 뛰어넘는 작업이 많지 않다. 야투 역시 형식화의 과정 속에서 퇴행적인 현상을 피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새로운 미술을 탐색하던 시기에 보여주었던 참신한 감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자연과의 만남 자체가 의례적인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2. 탈개성화
나를 내려놓고 자연을 따른다는 야투의 방법론적 태도는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자연의 다양한 면모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하지만 '나'라는 독립된 존재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자연이라는 보편적 세계에 주목하는 자연미술은 때로 자연 속에서 같이 작업하는 다른 작가들과 유사한 감흥을 공유하게 된다.
개인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보다는 자연을 따르는 자연미술작업은 유일무이한 자신의 존재성을 드러내는 것을 우선으로 하지 않는다. 작가의 개성을 조금이라도 더 강조하는 순간 다른 미술과의 근본적인 차별성인 자연의 미술로서의 강점은 약화된다.
III 자연미술의 확산과 순환
비록 자연미술이 자연이 가지고 있는 자연 자체의 생명력에 근거해서 작업을 한다고 하더라도 작가의 개성을 강조하는 미술과 분리 될 수 없다. 현장 작업을 사진과 영상 등으로 기록하는 순간 그 작업은 인간의 미술로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곧바로 작가만의 고유한 세계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 앞에 서게 된다.
이러한 질문을 피하는 방법은 사진이나 영상 등의 기록을 일체 남기지 않음으로서 기존의 미술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일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우리는 이 상황 즉 자연미술과 인간의 미술과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해야한다. 순수 자연과 만나는 자연미술을 통해 나를 무화시키는 한편 나를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미술작업으로 이어지고 다시 자연으로 나아가는 창의적 순환의 흐름을 만들어야한다. 상호 작용하는 자연계와 인간계 이 두 세계를 관통하면서 자신의 예술적 가능성을 넓혀 나가야한다.
1. 몰입
자연미술의 방법론적 발전을 위한 시도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자연 속으로 더욱 깊이 몰입해 들어가는 것이다. 그동안 아무리 많은 자연 속에서의 자연미술 작업이 있었더라도 자연은 날마다 새롭고, 사회 환경 역시 언제나 변화의 과정에 있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 역시 성장, 경험, 학습 등을 통해 달라지기 때문에 자연과 인간의 만남은 언제나 새로울 수 있다.
내가 무엇인가 해보려는 의지가 최소화되는 순간 창작 열망이 반작용을 일으킨다. 나의 생각을 비워냄으로서 나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과 환경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게 되고 이전과는 다른 눈으로 그것들을 보게 된다. 자연을 경제적 이용 가치로만 생각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자연예찬 시각으로만 자연을 바라보는 것 역시 피상적 접근에 그치게 할 수 있다. 자연과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응시하면서 자신의 몸과 의식이 어떻게 남다른 반응을 하는지 느껴야만 나의 고유한 존재성 또한 자연과 더불어 드러낼 수 있다.
2. 동시대미술로의 역확산
1980년대 초반 야투현장에서는 한 대의 카메라로 모든 작품을 촬영하였다. 작가들이 흩어져 작업을 하다가 어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카메라를 가진 작가를 소리쳐 부르거나 찾아서 사진을 찍었다. 때로는 미처 사진촬영을 하지 못하고 지나간 작품도 있었다. 사진기록보다는 작업행위 자체에 더 큰 비중을 두었던 시기였다. 당시 사진 기록이 자료집을 위한 부수적인 것이었다면 지금은 대부분의 작가가 직접 촬영하고 컴퓨터상에서 디지털 이미지를 보정하고 트리밍, 콜라주등의 사진 편집 작업을 하고 있다. 자연미술이 사진적인 측면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권오열 Kwon Oyeol, 차이와 반복 1735 / 2017 전원길 Jeon Wongil, palm leaves / 2014 Marty Miller, 2017
자연미술은 카메라로 기록되는 순간 자연의 생생한 작용이 사라지고 하나의 이미지로서 감상의 대상이 된다. 기록된 이미지도 일정 부분 자연의 느낌을 가지고 있지만 온전히 자연과 함께하는 미술 상태라고는 할 수는 없다. 사진은 작가의 미적 판단의 결과로서 존재한다. 사진을 통해 기존의 미술로 귀환한 자연미술은 자연이 지녔던 생동감을 시각 언어를 통해 되찾아야하며 참신한 개념을 통해 미적 쾌감을 불러일으켜야만 미술 안에서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또한 사진이나 영상 매체의 특성을 활용하여 자연의 생명력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이제 사진이나 비디오와 같은 기록 중심 매체뿐 만아니라 회화, 설치, 사운드아트 등의 미술 영역으로 들어가서도 자연의 생명력과 관계하는 새로운 방식을 찾아 나가야한다. 최소한의 개입을 통해 자연과 미술의 경계 지점에서 미적 교감을 실현했던 야투의 초탈한 태도가 또 다른 형식의 미술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순수 자연과의 접촉면을 풍부하게 넓혀온 작가라면 삶의 다양한 생태적 양상 속에 담겨있는 미생의 미적요소들을 확장된 미술 개념 안으로 연결하는 시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자연과 미술 그리고 삶이 하나로 연결된 순환의 미술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자연미술이 반드시 사진, 영상, 회화, 설치 등의 매체를 통해 동시대 미술 안으로 들어와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누군가 아마도 그랬듯이 아무도 보지 않는 숲속에서 홀로 작업하고 그 흔적과 기록을 남기지 않는 작가의 작업 또한 존재하길 바란다.
전원길 Jeon Wonil, 夢遊똥源圖 / 2018 김순임 Kim Soonim, 노자와 차를III / 2012 전원길 Jeon Wongil, 백초를 기다리다, 2015
지금까지 자연미술이 필연적으로 이르게 되는 탈개성화와 유형화에 따른 작가부재상태의 문제를 지적하고 어떻게 새로운 확산과 순환의 길로 나아 갈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나는 자연미술이 그 자체로서는 불충분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미술의 한계는 인간의 자기실현을 향한 본성적 의지가 멈추지 않는데서 오는 것이다.
자연미술은 지금의 나를 넘어서 지속적으로 다음페이지를 써 내려가야 한다. 이를 위해 더 깊이 자연 속으로 들어갈 것이며 더 넓게 인간의 삶과 예술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동시대 미술의 새로운 영역을 열어갈 것이다.
대안미술공간소나무 기획 -2018 프로젝트 그린- 카탈로그 수록 특강원고 일부수정 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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